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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공감

교회의 경쟁적인 단기선교, 무엇을 위함인가?


방학시즌이 되자 일정규모 이상의 많은 교회가 앞다투어 팀을 꾸려 동남아, 아프리카등으로 단기선교를 보낸다. 주변에 교회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교회에서 동남아등지로 단기선교를 보내거나 자신이 직접 단기선교에 참여한다고 한다. 나 역시도 지난 2년동안 필리핀에  3박5일간의 단기선교를 다녀온 경험이 있다. 그러나 올해는 단기선교에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금전적인 문제도 컸지만 단기선교 가운데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교회에서 방학시즌이 되면 단기선교란 이름으로 팀을 꾸려 동남아, 아프리카 등 대체적으로 가난한 국가에 사람들을 보낸다(사진은 글의 내용과 전혀!! 상관이 없음)


얼마전 일요일에 예배를 드리기 전, 단기선교를 가게되는 교회동생과 대화중에 자연스럽게 단기선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이야기의 요지는 "나는 가기싫은데 부모님이 보내서 억지로 간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를 마친 후 가기싫은 애를 억지로 외국에 보내는것이 과연 선교란 말인가? 이런 애들이 선교에 대해서 바른인식을 갖게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이 쓴 편지들을 아무리 뒤져봐도 독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해야 한다고 양심을 자극하는 대목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단지 제자들과 성령을 경험한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선교사역에 동참했음을 알 수 있다. 선교의 형태에 있어서도 의도적으로 전한 것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 있는 자들이 제기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교회에서 선교의 타당성에 대한 논리를 펼이며 주장하는 근거가 선교는 '명령'이라는 것이다. '선교명령'이라는 말은 선교를 기쁨이 아니라 부담으로, 복음의 일부가 아니라 율법의 일부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선교는 교회나 부모의 강요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성과 기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기복신앙은 한국 기독교가 가진 특유의 문제점이다. 언제부턴가 내가 믿는 신이 나에게 복을 주는 도구로써 전락해 버렸고, 그 복은 성도의 숫자나 물질등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것들과 연관되어 있다. 언젠가 목사님이 선교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단기선교를 시작하면서부터(우리교회는 올해로 3년째 필리핀으로 단기선교를 보내고 있다) 성도수가 늘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고로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새신자들'이란 복을 주셨고, 이를 통해 단기선교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임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언제부터 성도수가 복의 잣대가 되었단 말인가? 또한 늘어난 성도수가 어떻게 해서 단기선교로 인한 댓가라고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예수님은 조건없는 사랑을 행해라고 가르쳤다. 복을 얻기위해, 성도수를 늘리기위해, 하나님과 '딜'을 하는 선교는 교회에서 다시 한번 재고해 보기 바란다. 

나는 지난 3월 강정마을을 다녀왔는데, 그 후에도 강정에 대해 더 많이 알아보려고 하고,  강정앓이를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참여하여 강정을 알리는 한편  학교나 교회에서 내가 강정에서 보고 경험한 것을 알리는 등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나름대로 강정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일상생활 가운데에서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경험에 본 단기선교에는 그와 같이 일상생활과 연결되어진 것들이 결여되어 있는 것 같다. 그저 그곳에서의 행복했던 경험만 기억하면 될뿐 일상속에 돌아와서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다. 1년동안 다음해의 선교를 기대하기만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기선교에서 만난 어린이들과의 추억을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곳의 아동들이 나의 생각없는 소비생활이 기업을 거쳐서 그 곳에 아동들에게 노동력착취라는 족쇄를 채워줄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바로 이곳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다. 


참고: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IVP-